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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역소개

INTRODUCTION

마을소개
전통의 맛과 향이 살아 숨쉬는 의령 덕실권역 홈페이지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척곡마을

 

척곡마을의령읍에서 서남방으로 약 십리길인데 쑥 들어앉은 동네로서 세 뜸이다. 요즘은 모두「척곡」으로 부르지만 옛 이름으로는 「자고개」「자실」이었다. 이 동네 사람으로 출가한 분들의 택호가 모두 「자실띠기」(자실댁)이다. 동구 밖 한길가에는 삼충각(三忠閣)과 효열절부비 등 가산란(嘉山亂)에 전공을 세운 제경욱(諸景彧)장군, 임란때 용전순절한 제말(諸沫) 제홍록(諸弘祿) 두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자 왕명으로 세운 정려가 있다. 또한 동네 바로 뒤에는 벽화산이 있다. 이곳에는 칠원제씨가 아닌 타성받이는 석집이상 불어나지도 않는 다는 속설이 있어서 그런지 제씨는 37집으로 대성인 반면 주씨·박씨가 두어집씩이고 왕·노·안·홍씨등 여러 성받이가 있지만 그저 한두집씩이다.

 

운곡마을

 

운곡마을의령읍에서 남서쪽으로 긴 골이 있고 여러 마을이 이어져 있는데 보통 덕곡(德谷)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의령읍은 풍덕(豊德)과 덕곡(德谷)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그 때의 동명이 가항(加項), 남(南德谷)또는 자양동(紫陽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행정구역의 개편과 동리명 일제정리 때 남재(南峴)를 기준으로 해서 상·중·하리로 바꾸었다고 하며 지금은 행정구역상 중리이고 협동으로 척곡(尺谷)이 포함되는 데 척곡의 고유명은 「자실」이라 옛 지명을 이은 셈이다. 마을 뒤로 덩치 큰 벽화산이 있고 어음산(어은산)이 안산으로 있다. 마을 앞쪽에 나직한 산등대가 있는 데 하나는 노송이 많이 있어「솔밭등」이고 또 하나는 대밭이라「대밭등」이다. 대밭등 옆의 신안 주(朱)씨 선산이 많은 곳을 무수방(舞袖方)으로 부르고 있는데 선녀가 내려와서 춤을 추고 놀던 곳이라는 뜻이다. 큰 동네는 아니지만 문화유적이 많이 있다. 신안 주씨의 중시조 주부자(주자)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도동사(道東祠)와 향사를 드리면서 강학추원하던 도장으로 이용했던 운곡강당(雲谷講堂)이 보존되어 있다. 동네 어귀 한길가에는 세충신의 정려가 있는데 「삼층정려각」을 줄여서 삼충각(三忠閣)이라 한다.

 

상신마을

 

옛날 풍덕(豊德)과 덕곡(德谷), 덕실)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절에는 덕실구역이고 관청소재지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 박씨 정미소터가 면소재지였다고 한다. 법정동리로는 산다마을과 함께 상리(上里)에 속하는 데 새터(새터말)라 불러왔다. 「새터」「새말」「새몰」「새땀」「새편」「새동」등의 지명을 가진 마을은 모두가 고촌 옆에 새로 형성된 마을(뜸)인 것이다. 이 동네는 덕실골짝 가장 안쪽(위쪽)에 위치해 있어서 「웃말」「웃땀」으로 부르게 되었고 「새터」로 구분해 부르면서 신기(新基)로 정했던 것이다. 그 뒤 행정이동이 생기면서 앞글자만 따서 「상신(上新)」이 된 것이다. 활처럼 굽은 골이 십리도 더되는데 서남쪽에 열두굽이 험준한 잿길로 유명한 남재가 머리맡이 된다. 남재는 화정·진주방면으로 통하는 유일한 잿길인데 광복 전만 해도 행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대로였다고 한다. 마을은 큰 동네와 양지편이 있고 북쪽이 길게 트인 채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마을 앞쪽 큰 산을「원팔이갓등」이라 부른다. 옛날 제법 부자소리 들으며 살던 김원팔씨 소유의 산이라 사람이름을 그대로 지명화한 것이다. 선산 바로 밑에 벽화재(碧華齋)는 안동 권씨 입향조이며 여러 고을 현감과 군수 그리고 삼척부사와 광주목사를 지내신 상암 권준(權濬)공의 묘소였다. 관직에 계실 때 언제나 녹봉의 절반을 떼어서 가난한 민초를 보살피는데 쓰도록 했던 분이다. 「얼음처럼 맑고, 백옥같이 깨끗한 목민관」으로 칭송받던 분이라 여러 곳에 선정불망비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동네 주위에는 밤밭이 많고 감도 많이 생산된다.

 

산다마을

 

의령읍 덕실(德谷)골 중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산협마을이다. 옛날 지명은 「산대골」이었다. 비슷한 지명으로 「산대배기(산대박이)」는 산꼭대기 또는 깊은 산골짜기를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그리고 산죽(산에 자생하는 대나무, 시누대(식대·순어리대)라고도 한다)이 많은 곳이라서 산죽골이니 산대골이란 지명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이곳 산대골이 산다(山多)로 정해진 것은 고유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훈(의미)은 무시한 채 음(독음)을 위주로 정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안산다와 바깥산다(외산다) 두 뜸과 건너골에 두어집이 있다. 동네밖에 간좌방위로 경사진 산등에는 남씨문중의 선산이 있다. 동네 뒤로 오감재, 가매실재, 대산재, 마내재 등 산고개잿길이 많은 데 모두 고개너머 닿는 동네이름을 붙였다. 아득한 옛날 방물저자가 섰다는 박령재의 바로 밑에 있는 마을로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란 얘기도 있다. 그래선지 몰라도 박령재 건너 동북쪽 가파른 산등대에는 기묘사화때 환란을 피해서 이곳에 잠시 살았던(일설에는 유배살이를 했다고도 함) 좌의정 안당공의 묘소가 있다. 고려가 망하고 역성혁명의 혼란기에 개성 왕씨 일가가 이곳에 정착했다고 하며 옛 도읍 송도를 잊을 수 없어서 재실이름도 모송재(慕松齋)다. 모송재 안에는 자헌대부 행강릉부사를 지내신 왕장(王璋)공과 병사를 지내신 왕종지(王宗智)공의 추모비도 서 있다. 아랫산다 동구 밖에는 허덕재구지(許德齋舊址)란 글이 새겨진 자연석의 큰 비석이 서 있는 데 원래 덕재란 허씨 재실이 있었던 자리라서 표석으로 세운 것이라 한다. 그리고 행실이 바르고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 고을 유림에서 효열부 표창을 했다는 내력이 새겨진 칠원제씨효열비가 돋보인다. 이 마을에는 덕수 장(張)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하며 뒤따라 개성왕씨를 비롯해서 여러 문중이 들어왔다고 하는 데 지금은 김씨, 심씨를 비롯하여, 장·왕·서··표·남씨 40여 가구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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